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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토벤, 궁정에서 시민사회로

  • 첨부파일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자 2024/07/15

  • 우리는 여러 관점에서 베토벤을 마주한다. 그는 음악사적으로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추앙의 대상이면서 관습에서 벗어나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다. 반면 인간적으로는 고집불통에 강박적이었고 청력 상실과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KMA가 주최한 ‘수요일에 만나는 지혜의 향연’에서 조은아 경희대 교수는 교향곡 ‘영웅’을 중심으로 베토벤의 세계를 탐색했다.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때 보통 외모나 성격, 건강 상태 같은 것을 지표로 삼는다. 이런 측면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한눈에 봐도 친절함이나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는 168㎝ 정도로 유럽인 치고는 단신이었고 머리도 굉장히 컸다. 전체적으로 땅딸막하고 굵은 골격을 갖고 있었다.
    얼굴을 보면 이마가 넓고 미간의 주름과 강렬한 눈빛이 특징이었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어 야만스러운 느낌마저 났다. 
    뿐만 아니다. 베토벤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었다. 귀가 들리지 않았고 평생 만성 복통 및 두통에 시달렸다. 케임브리지대 생물인류학 연구팀은 베토벤이 남긴 머리카락을 채취해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 결과 궤양성 대장염, 류머티즘, 폐렴, 시력 감퇴, 편두통 등 여러 병력을 추적하기도 했다. 우울증과 망상에 시달렸다고도 전해진다.
    이런 베토벤은 1770년 독일 본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궁정 음악가로 활약했는데 베토벤은 할아버지를 인생의 롤모델로 생각하며 평생 존경했다. 반면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은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 열등감과 좌절감으로 괴로워했다. 그래서 인정받지 못한 음악적 재능을 아들을 통해 보상받으려 했다.
    여섯 살 꼬마 모차르트가 음악 신동으로 주목받자 요한은 자신의 아들도 모차르트처럼 유명한 음악가로 키우려 했다. 때문에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를 배워야 했고 연습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밖에 나가 놀 수 없었다. 베토벤은 어린 시절을 “아버지 앞에서 묘기 부리는 원숭이와 같았다.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고 싶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박적인 유년 시절은 베토벤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지독한 외골수에 인색하고 불같은 면이 있었다. 또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했다. 
    베토벤이 남긴 일기장과 귀가 안 들리게 된 후 필담을 나누던 대화 노트에는 “운명의 목덜미를 움켜쥐겠다. 나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의 타협하지 않는 성격과 강인한 투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연주 스타일
    베토벤은 고전주의 시대에 활동한 음악가다. 고전주의 음악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이 시대의 대표 작곡가 삼총사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꼽는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모두 인연이 있다. 17세 때 빈을 방문해 모차르트 앞에서 연주했는데 당시 모차르트는 “저 청년을 주목하라. 언젠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베토벤은 22세가 되면서 빈으로 본격적인 유학을 떠났다. 명망 높은 하이든을 찾아가 1년간 작곡을 배웠지만 너무 바쁜 하이든은 그를 잘 지도하지 못했다. 그나마 레슨을 받을 때조차 베토벤은 하이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자신이 동의하는 음악적 지식만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내다 버렸다. 
    베토벤은 “나는 하이든에게서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라고 불평했다. 그러나 훗날 베토벤은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듣고 그가 위대한 스승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하이든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한편 베토벤이 도착했을 당시 빈은 합스부르크 왕조 시대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프란츠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합스부르크를 한 차례 침공하면서 왕조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혁명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왕궁은 시민들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낙천적이고 즐거운 문화예술을 권장했다.
    이 시대의 음악가는 밤마다 사교 파티나 유흥 모임에 가서 사람들의 환심을 얻으려 했다. 당시 음악은 사교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기에 음악가는 구두 수선공이나 재단사 같은 수공업자로 취급받았다. 하인 복장을 착용해야 했으며 작곡한 음악의 소유권도 보장받지 못했다.
    베토벤의 스승 하이든도 29년간 왕궁 소속 음악가로 생활하면서 격한 업무와 외로움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휴가를 보내주지 않는 고용주에게 항의하기 위해 교향곡 45번 마지막 악장에서 단원들이 한 명씩 촛불을 끄며 퇴장하도록 음악을 설계했을까. ‘고별’ 혹은 ‘촛불’이란 별명이 붙은 이 교향곡은 하이든의 음악적 노동 쟁의였던 셈이다.
    그러나 베토벤은 달랐다. 그는 귀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다정한 멜로디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차르트나 하이든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듯한 투명한 악상을 선보였다면 베토벤은 격렬하고 과감하게 화음을 내리쳤다. 팔의 하중을 활용해 열정적으로 연주했기에 베토벤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난 뒤에는 끊어진 피아노 줄이 덩굴처럼 꼬여 있었다.
    청중이 베토벤의 연주에서 진동을 느끼며 “의자 아래에 폭탄이 설치된 것 아니냐”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베토벤은 굉장히 파격적인 연주 스타일을 보였다. 이는 결국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빈 음악계를 들썩이게 했다. 
    1808년 빈에서 개최된 공연 통계를 보면 하이든이 5번, 모차르트가 2번 무대에 오르는 동안 베토벤은 32번의 공연을 진행했다. 고전파 삼총사 중 베토벤은 그만큼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베토벤의 개성이 폭발한 ‘영웅’ 교향곡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베토벤의 사회적 가치관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는 공화주의자가 됐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역사의 수호자라고 생각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 정신에 매료되는가 하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됐다는 소식에 열광했다.
    혁명의 기운은 빈 음악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베토벤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귀족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세 번째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부제를 붙여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베토벤이 믿었던 혁명주의자는 1804년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스스로   왕관을 쓰며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에 실망한 베토벤은 “그 역시 평범한 속물에 불과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오로지 자기 야망에만 탐닉하겠다는 것인가”라며 절규했다. 그리고는 교향곡 제목을 ‘보나파르트’에서 ‘에로이카’, 즉 ‘영웅’으로 바꿨다. 베토벤의 분노를 증명하듯 그가 직접 쓴 악보 필사본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쓴 부분을 종이가 뚫릴 정도로 거칠게 지운 자국이 남아 있다.
    ‘보나파르트’가 특정 인물에 대한 헌사였다면 ‘영웅’은 보편적인 영웅에 대한 헌사라 볼 수 있다. 교향곡 3번 ‘영웅’은 1805년 4월 7일 베토벤이 직접 지휘하며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 베토벤은 이미 심각한 청력 이상을 앓고 있었지만 이 사실을 숨긴 채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들을 수 없었기에 강력하고 폭발적인 음량으로 승부하려 했다. ‘영웅’ 교향곡에 극적인 음향과 다이내믹한 대비가 녹아 있는 이유다.
    ‘영웅’을 기점으로 베토벤의 개성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다정하고 섬세한 선율에 익숙한 청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괴물 같은 미래의 교향곡”이라는 그나마 호의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연주를 중단시킬 수 있다면 입장료를 두 배라도 지불하고 싶었다”라는 등 악평도 쏟아졌다.
    ‘영웅’은 레고 블록을 연상시킨다. 블록 하나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여러 블록을 모으면 무궁무진하게 조합하고 변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베토벤은 선율 자체를 자잘하게 분해해 레고 블록처럼 활용했다. 교향곡 1, 2번이 선율이 살아있는 교향곡이라면 3번부터는 짧은 모티브를 가지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귀에 이상이 생긴 베토벤은 ‘영웅’을 피아노 앞이 아닌 책상에서 작곡했다. 머릿속에서 음향 실험실을 가동해 누구도 하지 못한 파격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했다. 그중 하나가 불협화음의 충돌이다. 곡은 조 바꿈이 굉장히 빈번할뿐더러 생뚱맞은 조성으로 거칠고 낯선 느낌을 준다. 또한 1주제에서 2주제로 넘어가는 경과부는 청중이 폭력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극적이다.
    ‘영웅’은 초연 당시 대다수 청중이 괴이하다는 이유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길긴 하지만 과감하다. 열정과 광기가 살아 있다”라며 가치를 인정한 비평가들도 나타났다. 베토벤 스스로도 ‘영웅’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는 제자와의 대화에서 ‘영웅’을 “나의 시그니처 교향곡”이라 칭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영웅’은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1악장은 ‘쾅쾅’ 하며 지축을 흔드는 듯한 두 마디로 시작된다. 오케스트라의 도입부를 서주라 하는데 교향곡에서 서주는 청중들의 주의를 사로잡는 동시에 단원들이 손가락과 심리 상태를 워밍업하는 구간이다. 하이든은 서주를 즐겼는데 보통 30초 정도 느리게 진행하다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모든 오케스트라를 총동원해 딱 두 번의 화음을 들려주며 시작했다. 모든 악기가 동참하는 것을 오케스트라 투티(Tutti) 혹은 총주라고 하는데 베토벤은 도입부부터 투티로 등장하며 청중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러니 단원들도 엄청난 집중력으로 지휘자에 주목해야 했을 것이다.
    보통 멜로디를 만들 때 이웃해 있는 다양한 음을 사용하지만 베토벤은 화음의 구성만 가지고 다양하게 펼쳐냈다. 음악적으로는 매우 단순하지만 듣기엔 전혀 단조롭거나 지루하지 않다. 이처럼 선율이 아닌 간단한 음악적 요소만으로 풍부하게 풀어내는 것이 베토벤의 장기였다.
    1악장에서는 불협화음이 연속적으로 충돌하며 극적인 에너지를 배가한다. 그리고 마침내 절정을 만들어 내는데 여기에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라는 베토벤의 전형적인 서사가 있다. 듣지 못하는 것은 음악가에게 아주 치명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 빛의 환희를 향해 나아가는 서사가 ‘영웅’에 드러나 있다.
    그렇다고 베토벤이 늘 고통에 몸부림치며 투쟁만 한 건 아니다. 베토벤은 유머가 살아있는 작곡가였다. 일례로 오케스트라에서 호른은 가장 불기 힘들며 실수가 잦은 악기로 악명 높다. 이에 베토벤은 일부러 호른이 들어갈 타이밍을 못 맞춘 것처럼 설정했다. 청중의 주의력을 환기시키기 위한 베토벤만의 음악적 농담이었다.
    50여 분에 달하는 긴 1악장이 끝나면 완전히 대비되는 2악장이 시작된다. 베토벤은 독특하게 2악장에 장송 행진곡을 등장시켰다. 이는 장례식 때 관을 짊어지고 느린 걸음으로 무덤을 향해 가는 행렬을 연상하게 한다. 이에 대해 베토벤이 직접 언급한 바는 없지만 영웅의 황금기만이 아닌 명과 암을 다 표현하려 했다는 추측이 많다.
    느릿하고 장중한 단조로 전개되던 2악장은 중간 부분에 이르러 장조로 변환된다. 마냥 슬퍼하는 게 아니라 유토피아를 음악적으로 구현한 듯하다. 이후 영웅이 고난에 맞서 싸운 역사를 현악기군과 관악기군의 충돌로 표현했다.
    3악장은 ‘스케르조(Scherzo)’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교향곡은 가사 없이 음으로만 전달되다 보니 청중이 이해하는 데 진입 장벽이 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코드를 갖다 심곤 했는데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는 당시 왕궁에서 유행한 춤곡 ‘미뉴에트’를 세 번째 악장에 넣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화려한 미뉴에트가 너무 진부하고 속물적이라 생각해 대신 스케르조라는 장르를 발명했다. ‘농담’이란 뜻을 지닌 스케르조는 미뉴에트처럼 우아한 춤곡이 아니라 허를 찌르는 익살과 유머를 담은 춤곡이다.





    고통을 이겨낸 프로메테우스처럼
    ‘영웅’의 마지막 악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죄로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당한다. 베토벤은 자신을 신화적 인물에 대입했다.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자신도 귀가 들리지 않는 고통을 이겨내며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사한다고 봤다.
    베토벤은 ‘영웅’을 쓰기 전에 프로메테우스의 일대기를 발레곡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피아노 변주곡으로도 활용한 바 있을 만큼 그 멜로디에 애착을 갖고 있던 베토벤은 교향곡에도 이를 등장시켰다. 이렇게 다른 작품의 멜로디를 가져와 재구현한 예는 베토벤의 수많은 레퍼토리 중에서 ‘영웅’이 유일하다.
    프로메테우스의 선율이 지나가면 시골풍의 춤곡이 등장한다. 베토벤은 공화주의자로서 굉장히 소탈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그의 서민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어 막판 스퍼트로 접어들면 4악장은 수미쌍관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쏟아지는 듯한 초반의 선율을 상기시키며 ‘영웅’은 종착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는 마침내 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베토벤은 동시대 작곡가들과 달리 의뢰인의 취향에 맞추지 않았다. 음악에 개성을 입히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았으며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감행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악보와 작품 번호를 스스로 정리하며 대중에게 강렬하면서 영원한 영향을 주려 노력했다. 
    베토벤은 마지막 교향곡인 9번 ‘합창’을 작곡하며 “이것은 미래의 교향곡이다. 미래 세대가 100년 후에 내 교향곡을 인정해 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염원과 확신은 실현됐다.